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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플라비츠키(1830-1866)의 <타라카노바 공주의 죽음>(1864), 캔버스, 유화, 245x187.5. 그림 78

    김은희 교수의 러시아 명화 이야기 (6) - 타라카노바 공주의 죽음

    © Photo: Konstantin Flavitsky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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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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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 시인이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썼던 1938년은 일제강점기다.

    서구 문화가 급속도로 유입됐던 시기다. 러시아 문학을 동경했던 백석은 러시아어를 배웠다.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가 국경을 맞닿고 있는 두만 강변에서다. 문학뿐이겠는가, 분단 전까지 음악을 비롯한 문화예술, 유럽의 사조는 러시아를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풍랑과 격정의 한반도 역사에서 러시아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소 이념대결 결과 한반도는 분단됐다. 냉전이데올로기는 종식된 지 오래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전히 먼 나라다.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곰'과 '미인' '보드카'다. 러시아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런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예술의 본고장 러시아의 문화와 삶을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김은희 교수가 매주 한 번 <스푸트니크>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편집자 주>

    폭풍은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네바 강은 부풀어 오르며 울부짖고/끓는 물처럼 요동쳤다./돌연 강물은 격노한 짐승처럼/도시를 덮쳤다. 그 앞에/모든 것은 굴복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갑자기 폐허처럼 변했다. 강물이 불시에/지하실에 흘러들고/운하는 난간을 뚫고 넘쳐나/뻬뜨로뽈은 둥실 떠올라/트리톤처럼 허리까지 물에 잠겼다.

    — 푸슈킨의 <청동 기마상>(1833) 중에서-

    매년 가을이면 페테르부르크는 네바 강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를 겪는다. 그래서 강 주변은 18세기 초까지도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자연에 역행해 이곳에 도시(1703년 5월 16일 도시 창건일)를 건설한다. 그는 "이 곳에 도시를 세워 오만한 이웃 나라를 제압하리라. 대자연이 우리에게 유럽을 향한 창을 열고 바다에 튼튼한 두 발을 디디라 명하였다"며 "숙명적인 의지로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황제였다.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성 피터의 도시'(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불렸다.

    수많은 나무 기둥을 바다에 박아 건설한 페테르부르크는 농노들의 목숨과 피로 이루어졌다고 불릴 만큼 많은 희생을 치르고 세워졌다. 푸슈킨(1799-1837)도 "이 젊은 수도 앞에서 모스크바는 마치 새 황후 앞에 선 과부 황태후처럼 빛을 잃었다"라고 페테르부르크의 위용을 묘사했다.

    푸슈킨은 <청동 기마상>에서 자연에 역행한 표트르 대제와 그 결과인 홍수로 인해 약혼녀 파라샤를 잃고 미쳐버린 가난한 주인공 예브게니를 대비시키며 1824년에 있었던 페테르부르크 대홍수의 참사를 그리고 있지만, 역사상 가장 큰 홍수 피해로 기록되는 최초의 연도는 1777년이다. 1777년 페테르부르크 대홍수는 대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며 러시아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1824년 홍수가 수위는 더 높았지만 피해는 1777년이 훨씬 더 컸다.

    K.D.플라비츠키(1830-1866)의 <타라카노바 공주의 죽음>(1864)은 그 해에 지하 감옥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가짜 타라카노바 공주의 전설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역사 화가였던 플라비츠키는 이 작품으로 교수 칭호를 받게 되었고 예술계와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끌게 되지만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운 가짜 타라카노바의 아름다움과 천재지변 앞에서의 절망감이 잘 드러난다. 창문으로 세차게 밀려들어 이미 침대까지 차오른 물을 피해 침대 위로 뛰어오른 쥐들과 가망 없는 현실 앞에 선 그녀의 무력감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작품의 구성도, 색채도, 극적인 긴장성도 매우 뛰어나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자신을 타라카노바 공주라고 참칭했던 이 여인은 왜 지하 감옥에서 죽게 된 것일까.

    진짜 타라카노바(남편 성을 따른 것임) 아부구스타 티모페예브나(1744년경-1810) 공주는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1709-1762, 제위기간은 1741-1762)와 알렉세이 A. G. 라주몹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해외로 보내져 양육되었는지, 어떻게 결혼하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후사가 없자 조카인 프로이센의 왕족 카를 울리히를 데려다 계승자로 삼았다. 그는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자 러시아의 황제(표트르 3세)로 등극하지만 부인이었던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제위에서 물러나게 되고(1762년) 곧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1785년 예카테리나 여제는 해외에 머물던 타라카노바 공주를 러시아로 소환하여 강제로 모스크바의 이바노프 수도원에 유폐 시켰다.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그녀는 도시페야란 이름의 수녀가 되어 죽을 때까지 교회의 미사마저도 그녀만을 위해 따로 행해질 정도로 완전히 고립되어 지냈다. 평생을 자선활동과 독서와 수예 등을 하며 보냈던 그녀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죽은 후(1796년)에야 친척들과 접촉하게 된다. 몇몇 귀족들과 라주몹스키의 친척들이 그녀를 방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죽은 후에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사원에 묻혔다.

    그러나 가짜 타라카노바 공주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에 도전하려했던 대범한 여인이었다. 마리아 앙투아네트까지도 그녀의 미모를 질투 했었다는 이 여인은 수많은 숭배자와 연인을 두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했던 바람둥이였던 로젠 왕자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연인이기도 했던 러시아의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직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프라하의 술집 작부 딸이라는 설에서부터 독일 류베른 지역의 빵집 딸이라고도 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공후 가문 출신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그녀는 이글거리며 불타는 듯한 검은 눈을 가진 터키 여자 같다고도 했고, 얼굴은 슬라브족 같은 동양적 풍모에 몸매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여자 같다고도 했다. 어쨌든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신비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음에는 이견이 없다.

    미모와 지성으로 전 유럽에 수많은 숭배자들을 두었던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사랑과 충성을 바쳤던 오를로프 백작의 손에 의해 1775년 5월 유럽에서 러시아로 잡혀오게 된다. 페트로파블로스크 감옥에 갇혀 온갖 심문을 받지만 사제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결국 밝히지 않은 채 예카테리나 여제와의 면담만을 요구했다고 전한다. 몇 개월 후 그녀는 감옥 안에서 폐결핵으로 사망(1775년 12월 4일)했다.

    참칭자 타라카노바가 1777년 홍수가 나기 2년 전에 감옥에서 이미 사망했다는 기록을 염두에 두면 이 그림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화가는 전유럽의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 앞에서, 자연의 재앙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나약했던 한 여인의 운명을 대홍수를 배경으로 더욱 극적으로 그려냈다.

    올해에도 302번째 홍수를 기록한 네바 강변 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을 통해서 푸슈킨도, 플라비츠키도 대자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김은희
    © Sputnik/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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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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