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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스트에 대항한 참전 용사들… “우리는 전쟁터에서 태어났다”

    파시스트에 대항한 참전 용사들… “우리는 전쟁터에서 태어났다”

    © Photo: Lyudmila Saak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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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 파시스트와의 전쟁은 그 역사적 현장을 목격한 이들 각자의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전쟁은 모두에게 비극이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아이들에겐 더 처참한 기억이다. 걱정 없는 어린 시절을 대신해 전쟁 아동들은 친지와 가까운 이들을 잃으며 공포에 시달린 기억을 갖는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태어났다" — 이는 어린 시절 힘겨운 전쟁 시기에 놓인 이들의 얘기다. 나이와 상관 없이 그들 나름 어른들과 함께 침략자들과의 투쟁에 동참했다.

    오늘 우리는 류드밀라 사아캰 스푸트니크 뉴스 방송사 아시아 파트 편집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한다. 그녀 어머니 이름은 갈리나 프로코셰바. 전쟁 시절에 그녀의 운명이 내맡겨졌다.

    갈리나는 1928년 수히니치 도시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남서쪽으로 250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시지역이다. 전쟁 발발시 그녀의 나이 13세. 1941년 6월 22일 수히니치 지역민들은 라디오를 통해 전쟁 발발 소식을 무겁게 맞이했다. 당시를 그녀는 이렇게 기억한다:

    «집집마다, 심지어 거리마다 있었던 재생 확성기를 통해 전쟁을 알았다. 첫 느낌은 물론 공포와 혼돈이다. 여름 아침, 청명한 하늘 그리고 방학 — 이 모든 것들은 '전쟁'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리속에서 지워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 아무도 몰랐다.

    파시스트 승전 진실을 지키는 법
    © Sputnik/ Vladimir Vyatkin
    전쟁 발발 후 수일이 지나자 14세에서 16세까지 아동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부모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통보가 따랐다. 우랄 지역으로 보내진 그들은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하며 일했다. 난 당시 후두염을 앓아 고열로 누워있어야 했기에 그곳에 가지 못했다. 당시 전쟁이 시작되며 '해방'이란 단어가 회자됐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며 해방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다.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난 아동들을 우선적으로 대피한 정책이 국가의 맥을 잇기 위한 대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들 대피시킨 후, 어른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지만, 갈곳이 있거나, 피난갈 노자돈이 있는 이들로 제한됐다. 남은 이들은 참호 파는 일에 동원됐다. 독일 탱크가 수월히 작동치 못하도록 참호를 팠다. 당시 지역민 중 그 누구도 탱크가 그리 많을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수히니치는 그야말로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1941년 10월 7일 독일군이 수히니치 시지역을 점령했다. 이 지역은 철도 요충지로 독일군에 있어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독일군은 시지역은 물론 주변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독일군뿐 아니라, 소비에트군에 의한 수많은 지령과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히틀러는 20회 이상 자신의 장군들에게 "무엇보다도 수히니치를 수호하라"고 당부했다.

    갈리나 프로코셰바
    © Photo: Lyudmila Saakyan
    갈리나 프로코셰바

    태어났던 건물에다 독일군들이 본부를 두었었다고 갈리나 씨는 회상한다. 계속해서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자:

    «독일군이 우리를 건물에서 내쫓았다. 몇 가족이 함께 낯선 이들의 집에서 기숙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들에 남아 있는 감자, 뿌리, 개암으로 근근히 생명을 이어갔다.

    우체국, 병원은 물론 상점도 문을 닫았다. 폭격시엔 지하실로 숨어들곤 했다. 폭파로 인해 하늘과 대지가 뒤섞였다. 나보다 5살 많은 오빠는 전쟁이 공포되자마자 즉시 유격대로 떠났다. 유격대는 주변 숲에서 활동했다. 만일 누군가 이것을 독일군에 밀고하면 엄마와 난 사살되었을 것이다.

    우리와 독일군 사이엔 '침묵과 증오'의 귀먹은 벽이 놓여 있었다. 어느날, 오빠가 엄마와 날 보기 위해 비밀리 시지역으로 잠입했던 날, 폭격이 시작됐다. 오빠는 유격대가 머무는 숲이 더 고요하다고 했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시면 총격, 폭발, 지뢰, 수류탄 굉음으로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서움에 떤 건 우리만은 아니었다. 독일군 역시 두려워했다. 유격대를 무서워했으며 러시아 '카츄샤'를 무서워했고 우리, 평범한 시민들을 두려워했다. 불순종, 통신 폭발, 유격대, 전단지를 무서워했다.»

    1942년 1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사령관이 이끄는 소비에트 제 16호 부대에 의해 수히니치는 해방됐다. 현격한 공을 시민 스스로가 지었다. 대조국전쟁 전투에서 1만 2천 여명이 넘는 수히니치 시민들이 희생됐다.

    시지역 전투에서만 1만 여명의 병사들이 숨졌다. 독일군이 장악하며 668명이 사살됐다. 1883명은 노예로 전락했다. 시 명예 시민중 예핌 오시펜코는 №000001 1등급 '대조국전쟁 유격대원' 메달을 받았다. 이는 소비에트 시절 첫 메달이었다.

    이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전쟁 초기부터 승리를 확신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적을 이긴다는데 의심 하지 않았다. 다만, 승리에 대한 댓가에 대해선 당시 누구도 생각치 않았다며 중요한 것은 승리 쟁취였다고 말을 맺었다.

    2015년 3월 87세 생일을 맞이한 그녀는 5월 9일 70주년 승전 기념일을 가슴 설레게 기다린다. 이 승리는 소비에트를 살았던 이들의 피요, 생명의 댓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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