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1월 2015, 14:23

남한과 북한의 인구통계는- 전체의 두 부분이다

남한과 북한의 인구통계는- 전체의 두 부분이다

최근에 인구통계학적 문제가 한국 대중의 초점으로 되어있다. 훨씬 덜 알려져있는 것은 북한과 그 지도부가 인구 문제에 심각히 접견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북한의 인구 정책의 모순된 프로세스가 한국의 인구 정책이 통과한 변동을 방불케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북한의 인구 정책이 3 단계를 통과했다. 북한 국가가 설립된1948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첫 단계에서 북한 정부는 출산율을 격려했다. 그 다음부터90년대 말까지의 두 번째 단계에서 이 정책은 출산율을 제한하고 인구 증가를 둔화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지난 15년 동안, 대체로 상태가 출산율 증가를 장려하는 정책에 돌아가게 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의 6.25전쟁이 거대한 인구 통계학적 손실을 주도했다. 북한의 인구는 110 만 명 하락해 1950년 초에 960만 명이었다면1954년 초에850만 명이었다. 그 중 약 절반이 전쟁에서 사망하고, 나머지 절반은 남부로 도망한 난민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북한 정부가 높은 출산율을 지원했다. 그 당시, 여성은 평균 6-7 아이를 낳고있었고 북한의 인구는 급속하게 성장하고있었다.

그러나 1965년경에 높은 출산율에 대한 공식 태도가 변경되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와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경제 성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둘째, 북한 지도부는 남한에서 박정희 정부가 전개하기 시작한 출산율 제한에 대한 활성 캠페인의 일부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피임에 대한 캠페인은 북한에서 전통적인 방법과 특정 방법으로 실시 되었다. 한편, 의사에게 피임약의 선전을 하도록 명령했고, 다른 편으로, 70년대 초반에 많은 아이들의 부모는 자신의 조직 회의에서 비판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또 선전을 활성했다. 아이들이 많으면 국가와 가족에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출산율을 줄이는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다. 1970년경 합계 출산율 (여성 1인당 출산의 평균 수)이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90년대에 산아 제한 정책을 포기해야 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약 60만명이 기아로 사망한 때인1996-99년대에 입은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서였고 일부로는 나라에서 출산율이 대체수준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북한지도부는 다시 어린이가 많은 가족을 장려한다. 하지만 5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런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없기에 모든 것이 좋은 의도에 불과하다.

남북한의 인구 통계학적 역사의 비교는 국가의 분할과 그 두 부분 사이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종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 똑같이 반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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